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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문헌과 고고학을 통해 본 기자조선의 실존 여부에 대하여

박신혜 2018. 10. 5. 01:45

출처 https://blog.naver.com/zz56371/220216897219

https://blog.naver.com/zz56371/220216897399

       (렌프루 님 블로그)


1.

 고조선의 건국연대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이 단군신화의 건국연대와 기자조선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의 건국연대를 인정하면 고조선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333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이고, 이를 부정하더라도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면 고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12세기경까지는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단군신화의 건국연대는 그 저 상징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중국만큼 오래되었다는 자부심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지만, 기자조선은 그 실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제 이를 입증할만한 자료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을 들어가기 앞서 우리는 기자조선 실존여부의 문제를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기자(箕子)는 중국 상나라(또는 은나라)시대의 현인으로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주왕(紂王)은 기록에 의하면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부과하여 창고에 돈과 곡식을 채우게 하였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처럼 고기를 매달아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며 노는 등의 매우 음란하고 난폭한 왕이었습니다. 이에 충신 중 한 명인 비간(比干)은 이러한 행태에 대해 지속적으로 간언하자 화가 난 주왕은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고 하면서 비간을 해부하여 그의 심장을 꺼내보았다고 합니다. 기자는 이러한 주왕의 행위에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하였지만, 주왕은 기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후 주무왕(周武王)이 천명(天命)을 받아 상()에 등 돌린 여러 국가들과 힘을 합쳐 상을 정벌한 이후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3.

 여기까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주무왕이 상을 정벌한 이후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었거나 또는 풀어준 이후 주무왕에게 하나라의 우왕(禹王)이 정했다고 전해지는 정치도덕의 아홉 가지 원칙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설파해줬다고 되어있습니다. 즉 선진시대에는 아직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폭군에게 간언하고 성군에게 치세의 대법을 진언한 현명하고 어진 신하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자가 조선에 갔다는 기록은 언제 처음 등장할까요? 이는 이로부터 한참 지난 전한시대(前漢時代)에 등장하게 됩니다.


4.

​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한문제(漢文帝, B.C 180~157) 때에 복생(伏生)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상서대전(尙書大傳)으로 이 문헌에서 기자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조선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선진문헌과 같이 상나라 시대 주왕에게 간언한 현인으로서의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같은 전한시기에 저작된 사기 송미자세가도 이야기만 조금 다를 뿐 기자에 대한 인식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우리가 잘 아는 기자가 조선으로 와 조선백성들을 교화하였다는 이미지는 후한시대(後漢時代)에 들어서 보이게 됩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후 예의로서 백성을 교화하고, 농사와 누에 기르기, 베짜기 등의 산업을 일으켰으며 이에 조선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졌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중국의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정착되기 시작해 조선은 기자의 후손으로서 그 계보가 40여세 이어져 마지막 준왕(準王)에 이른다고 하였고, 더불어 주나라 왕실을 받드는 존재인 것처럼 등장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수당시대(隋唐時代)에 들어서면 고구려에서 기자신(箕子神)을 받든다는 것을 보아 이 일대에서 기자와 관련한 전승이 완전히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이 이야기들을 종합하여보면 기자전승은 시대를 지나면서 차츰 확대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자가 무왕에 의해 감옥에 갇혀 주무왕에 의해 풀어졌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이것이 확대된 것이 주무왕에게 홍범구주를 설파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골자의 이야기가 전한시대에 확대되어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되고, 후한시대가 되면 기자가 조선으로 봉해져 조선백성들을 교화하였다는 이야기로 차츰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이것은 즉 기자 이야기가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고 추정하였던 근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진1> 요서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예기 유적지

(클릭하시면 원본보기가 가능합니다)

6.

 그런데 1970년대에 요서지역에서 청동예기(靑銅禮器)를 묻은 매납유구(埋納遺構)가 발견되면서 학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청동예기란 고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그릇을 말하는데, 1973년 요령성(遼寧省 또는 랴오닝성) 객좌(喀左) 북동촌(北洞村) 고산(孤山) 1, 2호 유적에서 각각 고죽(孤竹)이라 새겨진 술그릇()과 기후(箕侯)라 새겨진 세발달린 솥(方鼎)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이 외 객좌 소성자(小城子해도영자(海島營子산만자(山灣子소파태구(小波汰溝), 의현 화이루(花爾樓)의 매납유구와 객좌 고로구촌(咕嚕溝村) 수습 유물, 조양 위영자(朝陽 魏營子), 객좌 화상구(和尙溝고가동(高家洞) 무덤에서도 다양한 청동예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자 동래설을 긍정한 학자들은 주무왕이 상을 멸망시킨 후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을 사실이라 단정짓고, 이는 기자가 대릉하 유역으로 이동해 와 기자조선을 건국하였고, 더 나아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나라로 알려진 고죽도 이 유역까지 진출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사진2> 북동촌 유적 출토 정황


<사진3> 왼 : 고죽명 술그릇()과  기후명 세발그릇 솥(方鼎) / 오 : 고죽명 기후명 청동명문(맨왼쪽 고죽, 맨오른쪽 기후) 


7.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이 일대에서 발견된 청동예기 명문을 고죽과 기후 두 문자에만 집착하여 생겨난 오류입니다이 일대에서 발견된 명문은 이 뿐만 아니라 연후(匽侯), (), 사벌(史伐), 숙윤(叔尹), 백구(伯矩), (), (), (등 다양한 족속의 명문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고죽이 이 유역까지 진출하였다거나 기자가 이 곳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보았을 때는 다만 기후라고 칭해지는 집단이 이 곳으로 이주하였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죠그러나 재밌는 것은 이 일대의 족속 명문은 북경과 하북성 중북부일대에서도 똑같이 발견이 된다는 것이고, 출토량에서도 하북성 일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해도영자 유적에서 연후(匽侯)가 분우(饙盂)를 만든다는 명문이 적힌 밥그릇() 발견되었고소파태구에서는 왕께서는 성주(成周)에서 홀제를 거행하셨다왕께서는 어()에게 패()를 하사하셨다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기를 만든다는 기장을 담는 그릇(方座簋)이 적힌 명문이 발견되었는데이는 북경 유리하 연국묘지 253호 무덤에서도 똑같은 명문이 발견되었습니다이는 요서에서 출토된 기후명 청동명문이나 기타 여러 청동명문은 기족집단 등이 요서의 대릉하 일대가 아닌 하북성 일대로 이동하여 연나라에 정착하였음을 추측케 합니다.


<사진4> 요서지역 출토 다양한 족속 명문


8.

 그렇다면 요서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예기와 이러한 족속명문은 어떻게 해석해야할까요? 아직까지 이에 대한 뚜렷한 결론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학설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연나라에 있던 이들 족속들이 이 곳으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는 설(이주설), 연나라가 이들 지역에 청동예기를 분여해줬다는 설(분여설), 연나라가 일시적으로 이 지역으로 진출하였다는 설(진출설),요서 일대의 토착집단이 연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전리품을 획득하였다는 설(전리품 획득설), 하북성 일대의 여러 종족문화와의 교류와 교역을 통해 획득 하였다는 설(교역설) 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그마하게 첨언만 하자면은, 상말주초(商末周初)라 하는 이 시기에는 요서 일대에 위영자유형(魏營子類型)이라는 토착집단의 문화가 존재하였고, 사기 흉노열전에 의하면 이 시기 이 일대에 산융(山戎)이라 불리는 융적(戎狄)집단이 존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각기 분산되어 계곡에 거주하며 저마다 군장이 있고, 백여 융에 이르렀으나 서로 통일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이는 이 일대에 광범위하게 융적 집단이 분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기자니 기자조선이니하는 집단이 이 일대로 이주하여 국가를 건국하였거나 정착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9.

 이를 종합하여 보았을 때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문헌사료의 내용은 조작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떠한 연유로 이를 조작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나라는 무제(漢武帝)시기에 여러 정복사업을 펼쳤고, 기원전 109년에는 고조선을 침공하여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습니다. 여기서 한나라는 고조선을 침공하고 군현을 설치한 명분을 찾았어야 했을텐데, 여기서 중국의 현인인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전설을 만들어 조선은 원래 기자의 땅으로, 이 땅은 기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문명교화가 일어났으며, 기자조선은 주나라의 봉건국가였다는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원래 주무왕이 기자에게 봉해준 땅이니 그 후예인 한나라가 이 땅을 접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라는 것이죠. 또한 위의 상서대전이 한문제 때의 복생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최근에는 실제 복생이 지은 것이 아닌 복생이 죽은 후 그 제자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한무제 이후에 저술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기록에는 복생이 상서대전을 지었다는 것이 없고, 단지 상서의 전해지는 과정과 복생  장생(張生)  구양생(歐陽生)  아관(兒寬)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흐름만이 기재되어있고, 효문제가 상서를 구할 때 상서대전에 대한 언급이 일체 없다고 합니다. 이는 기자와 한사군 문제를 연결시켜보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기자의 동래와 관련해서 유독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만 언급되고, 정작 사기 조선열전에서는 기자와 관련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즉 이는 사마천이 기자의 동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거나, 송미자세가의 기자동래에 관한 것이 후대에 첨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는 것은 이 곳을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전설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

 이상으로 장황하게 기자동래설에 대해 서술해보았습니다. 이 글을 요약하자면 기자는 조선으로 온 적이 없고 기록은 조작된 것입니다. 그 근거로서 선진문헌에서 보이지 않던 기자의 동래가 전한시대와 후한시대에 들어서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고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침략 명분과 이 곳을 통치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러한 전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70년대에 요서 일대에서 고죽과 기후의 명문이 발견되어 이 일대가 기자조선이 건국된 곳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다른 족속명문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두 명문에만 집착하여 생겨난 잘못된 인식이며, 이 일대에서는 이 외에도 다른 많은 족속의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실제 이 족속명문들은 하북성과 북경 일대에서 더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요서 일대는 위영자유형이라는 토착집단의 문화가 존재하였고, 기록에 따르면 이 일대는 산융족이라 불리는 융적 집단이 거주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일대에 기후니 하는 족속들이 정착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기자조선설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출처(<사진2>~<사진4>) :

김정열 『요서지역 출토 상·주 청동예기의 성격에 대하여』 요하유역의 초기 청동기 문화 2009

吳江原 『商末周初 大凌河 流域과 그 周邊 地域의 文化 動向과 大凌河 流域의 靑銅禮器 埋納遺構』 韓國上古史學報 74 2011

李亨求 『大凌河流域의 殷末周初 靑銅器文化와 箕子 및 箕子朝鮮』 韓國上古史學報 5 1991

사진은 편의상 일부 제가 편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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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특집으로 쓰려고 했는데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글을 발견해서 그냥 펌글로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