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

"내가 뽑은 최고의 영웅은 김유신" 본문

"내가 뽑은 최고의 영웅은 김유신"

박신혜 2018. 9. 26. 22:20

김유신



윤진석 님의 글. 출처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499907866797781&id=100003357171878&hc_location=ufi


Su Jin Lee의 질문에 답함

* 미리 알아야 할 개념 :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따르는 높은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말함


----- 내가 한국고대사를 공부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난하는 태도에 대해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국통일은 비역사적 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시대까지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신랄한 비판을 한 이후 점차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환되었고, 최근에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하여 삼국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나타내면 매국노로 몰리게 될 실정이 되었다.


 삼국통일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의 대표가 바로 단재 신채호다. 단재는 마지막 고구려인을 자청했으니, 그의 시각에서 만주의 상실이 통한이었테고 따라서 김유신이 예뻐 보일 리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학자라면 합리적 해석을 해야 할 터인데, 단재의 김유신 평가는 해도해도 너무하다. 김유신이 한 것이라고는 음모와 협잡 뿐이라고 평가하면서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하지만 만주의 상실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아쉬움일 뿐 당시의 신라인들이 고려해야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있었을망정 ‘민족’은 없었다. 고구려와 같은 계통임을 자처하는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를 정벌해 줄 것을 요구하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길잡이가 되기를 자청할 정도였으니, 신라는 말해 무엇하랴 싶다.(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세력은 부여에서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신라의 지배세력은 계통이 달랐다.)


 오랜 세월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목적이 앞섰던 까닭에 ‘승자’에만 주목한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묻혀버리거나 왜곡당한 억울한 영혼이 적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패자’를 새롭게 조명코자 하는 경향은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패자에 대한 연민이 너무 과하여 가치가 전도되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 의자왕에 대한 최근의 평가를 보더라도 이러한 현상이 드러난다. 의자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삼천궁녀와 놀아났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의자왕이 정치를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는 연개소문 등 고구려 멸망기 정치인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은 ‘자멸’에 가까울 정도로 내부모순이 있었던 반면, 신라는 최상층 지배층인 김흠순과 김품일이 앞장서서 그 아들들인 반굴과 관창을 희생양으로 내모는,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조차 힘든 국가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나는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소국인 신라가 국난을 타개해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새로운 미래’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인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백제 의자왕의 신라공격이다. 의자왕은 즉위 직후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40여성을 빼앗고 마침내는 전략적 요충지인 합천 대야성까지 함락시켰다. 백제군이 서라벌 코앞까지 점령했으니 이제 신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런 국난을 앞장서 타개한 이가 바로 김춘추와 김유신이다


 김유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가들은 김유신의 불패신화를 들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김유신도 패배한 적이 많았다.(이런 점에서 김유신은 25전 25승의 이순신과 차이가 난다) 오히려 김유신이 위대한 점은 국망의 위기에 이익을 탐하지 않고 솔선수범한 점이다


 김유신의 업적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662년의 평양 쌀배달을 들 수 있다. 이는 전쟁의 업적이 아니라 쌀배달이라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지만, 기실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한 2년 뒤인 662년 당나라는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침략했다. 하지만 소정방의 대군은 추위와 전염병 등으로 고립되어 마침내 몰살위기에 몰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소정방은 신라에 의약과 식량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정황상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달도 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 확률이 높았다. 때문에 대다수 장군들이 꺼려 하고 있을 때 68세 노구의 총사령관 김유신이 자원했다. 실제로 이 때의 쌀배달은 엄청난 곡절을 겪었고, 김유신은 열기와 구근을 비롯한 특공대 15명으로 길을 뚫어 소정방에게 쌀과 의약품을 전해줬다.


 이처럼 신라는 백제를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당나라에 충성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내심 신라까지 집어먹을 야욕을 갖고 있었다. 1단계가 백제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는데, 온갖 협박에도 신라가 응하지 않자 꼼수를 썼다. 백제땅을 3등분하여 김유신과 김인문(문무왕의 동생) 김양도(신라장군이며 대중국외교관)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공공연히 떠벌였는데, 이는 문무왕과 그 왕족 및 신하들을 이간질하려는 술책이었다.

 이런 경우 꼼수에 말려들면 내분이 일어난다. 하지만 신라는 그러지 않았는데, 바로 김유신이 솔선수범하여 국가의 이익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또하나 김유신의 위대성을 꼽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들 원술에 대한 태도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는 신라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나당전쟁이 발발했다. 사실상 신라사에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이것이었다. 당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유신의 아들인 원술이 출전하여 대패하는 상황에서 임전무퇴를 어기고 살아 돌아왔다. 이에 김유신은 자기 아들을 본보기로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다행히 원술의 외삼촌이자 고종사촌인 문무왕의 보호 아래 원술은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김유신은 아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아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았다. 원술은 태백산에 숨었다가 4년 후 매소성 전투에 혜성같이 나타나 분전하여 지난날의 치욕을 씻었다 그리고는 어머니 지소부인을 찾아갔으나 지소부인도 남편 김유신을 좇아 아들을 보지 않았다. 결국 원술은 부모에게 버림받고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김유신을 욕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아들이 참전한 전쟁이 참패하여 아군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의 심정이 어떠할까? 그런데 아들이 살아돌아오면 부모 마음은 어떠할까? 기쁘지 아니하냔 말이다.

 하지만 김유신은 기뻐하지 않고 분노했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이 죽음으로 내몰았던 수많은 젊은이들....그들의 영정앞에 김유신은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 비록 쇼일 망정 역사상 드물게 부끄러움을 아는 장군이요 정치가였다. 남의 자식을 죽였으니 내 아들만 어찌 살기를 바라냐는 말....이 말은 동서고금의 정치가와 장군들이 다투어 떠들어댔지만 실상 실천한 이는 많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는 너무너무 희박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김유신이다. 내가 김유신을 최고의 영웅으로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유신



바로 이겁니다.


고구려.

진정한 민족의 방파제

수당을 격퇴한 빛나는 민족사

틀림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죠.


고구려가 모든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건 당연하고 저 또한 그 일원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것과 '고구려 우쭈쭈 고구려 빼곤 다 좃병신'

이건 명백히 다른 거 아닙니까?


저 시대는 방구석에서 키보드 두들기는 21세기가 아니라 7세기 삼국시대입니다.

배틀로얄에서 살아남은 신라에게서 배울 점을 찾진 못하고 왜 그들을 폄하하는 걸까요?


삼한이 원래 한 나라에서 셋으로 쪼개진 겁니까? 삼한이 남북분단과 같습니까?

아니죠. 각자 위치에서 세력을 넓히다 결국 국경을 마주하게 된 거죠.

이들에게 과연 첨부터 만나자마자 우린 동족~우린 한민족~손에 손잡고~ 이런 생각이 있었을까요?

민족을 팔아요? 매국노? 7세기 사람들한테 그 소리 해보십시오. 병신취급 당할 걸요.



그리고 신라가 정말 삼한일통을 이루고 바로 당한테 나라 바쳤나요?

아닙니다. 나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린 중국의 일부가 아닌 명명백백한 독립국임을 증명했습니다.

토번의 뒤치기에 따른 반사이익이요? 물론 그것도 맞죠. 당의 전력 투입을 조금이라도 줄였으니. 그렇다고 신라의 승리가 바뀌진 않습니다.


신라가 통일하고 그냥 나머지 백성들 나몰라라 했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세 집안이 하나가 되었다는 노래를 부르며 통일민족 개념을 만들었고 이것이 오늘날 한민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신라가 고구려 무시했습니까? 신라가 발해를 떨떠름하게 본 것도 왜일까요?

당연히 삼한일통을 노래하며 고구려의 정통성도 자신에게 있다고 했는데 위에서 떡하니 고려국왕을 자칭하니 당황하는 건 당연하겠지요. 물론 현실적으로 무너뜨릴 힘이 없으니 적당히 현실타협을 했지만.



안시성주 글에도 썼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은 고구려의 가치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습니다.


만주에 대한 로망. 

강력한 군대와 영토에 대한 제국적 로망.

힘자랑해보진 못한 역사에 대한 열등감.

역사를 자기 입맛에 따라 보려는 오만함.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내려온 고구려 띄어주기


등등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지금의 신라 멸시론이란 괴물을 낳았고 한국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아버렸습니다..


고구려뽕에 취하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멀쩡히 자기 할 일 다한 신라에게서 배울 건 배우고, 아니 적어도 무차별 비난 하지 말아야죠.


여러분들 여자들이 여러분 보고 니가 우리 오빠 대신 군대가셈. 천안함? 연평도? 목함지뢰? 내 알바아님.

이러면 납득하실 수 있나요?



그러한 국난 속에서 신라가 구심점을 잃지 않고 일치단결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김유신임을, 필자는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저 새끼랑 김춘추 때문에 고구려 망하고 만주 날라갔어!! 씨발 개새끼!!

이 짓 좀 그만하시고 최고 권력자임에도 편한 길을 추구하지 않고 신라의 통일에 일조한 김유신의 이러한 모습을 본받는 게 우선입니다. 이제는 좀 역사를 보는 눈이 바뀌어야죠.